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현대사 희로애락을 노래한 국민 가수
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현대사 희로애락을 노래한 국민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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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현인은 1919년 부산 영도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소학교 5학년 때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지만, 노래에 스며든 강한 경상도 억양은 60년 음악 인생 내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현인이 경성제2고보(경복고)에 재학 중일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부친이 일본인 여성과 재혼했다. 그 충격으로 유학을 결심한 현인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했다. 윤심덕, 홍난파 등이 그의 선배였다. 성악과를 중퇴하고 귀국한 현인은 성보악극단에 들어가 음악을 지도하면서 악극에도 출연했다.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끈 배우 황해, 박노식, 최성호 등이 이때대출사기
그에게 음악을 배웠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현인은 징용을 피하기 위해 중국으로 이주했다. 박단마, 황해 등과 신태양악극단을 결성해 상하이, 톈진 일대 클럽에서 공연했다. 일본군 위문 공연에도 불려 다녔다. 중국에서 해방을 맞은 현인은 단원 30여 명과 함께 귀국을 기다리다가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현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중도상환
. “빵을 해결하기 위해 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때인데 중국인들한테 다짜고짜 끌려갔어요. 일본놈 위문이나 다닌 쓸개 빠진 놈이라는 거지요. 그들이 비밀 재판을 하는 베이징으로 끌려가 배우 황해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어요”(동아일보, 1973.3.29.) 현인 일행은 중국 정부와 미국인 연락장교의 교섭으로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6월, 제16차 송카드연체자소액대출
환선을 타고 귀국했다.
서울로 돌아온 현인은 황해, 계수남 등과 ‘19번가’라는 악극단을 조직해 클럽에서 팝송, 샹송 등을 불렀다. 현인은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 ‘신라의 달밤’으로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했다. 해방 공간 최대 히트곡인 ‘신라의 달밤’이 탄생한 과정을 유호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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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현인
1947년 말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던 유호에게 같은 방송국에서 악단장으로 일하던 박시춘이 찾아와 “내일 당장 녹음을 해야 하니, 가사를 하나 지어달라”면서 “광복이 되었지만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노래가 없으니 ‘신라의 달밤’이란 제유심비
목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경주에는 중학교 수학여행 길에 가본 것이 전부였던 유호는 부랴부랴 자료실로 달려가 경주 지리책을 찾아 펴놓고 궁싯거렸다. 그렇게 하룻저녁 만에 가사가 붙여진 곡이 ‘신라의 달밤’이었다.(조선일보, 1991.1.17.)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전세금대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박시춘이 작곡한 곡조에 조명암이 작사해 한동안 ‘인도의 밤’으로 무대 위에서 불리던 이 노래는 조명암이 월북한 후, 이렇듯 신인 작사가 유호가 가사를 새로 붙여 ‘신라의 달밤’으로 재탄생했다. 박시춘은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악극단 공연에 신인 가수 현인을 발탁해 ‘신라의 땡큐론
달밤’을 부르게 했다. 굵직한 저음에 경상도 억양이 섞인 현인의 목소리는 고음으로 올라가면 목청을 심하게 떠는 바이브레이션이 매력적이었다. 관객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앙코르가 그칠 줄 몰랐다. 현인은 “똑같은 노래를 무려 11번이나 부르고서야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신라의 달밤’은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당시 ‘대한예나래저축은행
민국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모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서울 수복 때는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기 위해 ‘신라의 달밤’을 불러보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현인은 ‘푸른 언덕’(1948)이라는 음악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당시 현인은 오늘날 아이돌 가수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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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박시춘이 설립한 럭키레코드 앞에서 찍은 현인(왼쪽)과 작사가 유호(오른쪽)
박시춘은 럭키레코드라는 음반 회사를 차리고 유호를 문예부장으로 영입했다. 1호 음반으로 ‘신라의 달밤’을 출시한 데 이어 박시춘·유호·현인 ‘황금 트리오’는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 만리’, ‘럭키 서울’ 정기예금 금리
등을 연이어 출시해 히트시켰다. ‘럭키 서울’ 곡조에 작사를 의뢰받은 유호는 경쾌한 리듬에 어울리는 가사가 잘 떠오르지 않아 술만 마셔댔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서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며 가사를 구상하던 유호의 눈길에 창밖으로 조선호텔 앞을 돌아다니던 외국인이 들어왔다. “우리 서울에도 이제는 외국인이 많이들 찾는구나.” 그때 ‘해방의 환희와 서울의 활기를 담은 노래를 만들자’는 영감이 떠올랐다. 때마침 그가 피우던 담배 이름이 ‘럭키 스트라이크’였다. 그의 귓전에는 타이핑 소리가 맴돌았다.(동아일보, 1992.1.25.)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너도나도 부르자 희망의 노래/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S·E·O·U·L/ S·E·O·U·L/ 럭키 서울~”
해방의 환희를 노래하던 박시춘·유호·현인 ‘황금 트리오’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의기투합해 ‘전우야 잘 자라’를 발표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전우야 잘 자라’는 가요였지만 그 어떤 군가보다 군인들에게 사랑받았고, 학생들이 운동 경기를 할 때도 응원가처럼 불렸다. 비장한 가사와 어울리지 않게 1990년대까지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 즐겨 부르던 노래이기도 했다.
현인은 6·25전쟁 때 ‘군번 없는 용사’로 전장을 누볐다. 위문 공연을 다닐 때 차가 굴러 허리를 크게 다쳤고, 그 뒤로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똑바로 서서 부르지 못하고 피아노에 기대거나, 의자에 앉아서 노래해야 했다. 그 때문에 ‘건방져 보인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해방의 기쁨, 분단과 이산의 아픔, 6·25전쟁 승리에 대한 의지를 노래했던 진정한 ‘국민 가수’ 현인은 음악 인생 60년 동안 1000곡 이상의 노래를 발표했다. 2002년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그가 남긴 수많은 명곡은 후배 가수들이 다시 부르고 있다. ‘한국인이 사랑한 노래’를 꼽을 때 그의 곡이 빠지는 법이 없다.
부산 송도해수욕장에는 ‘현인 공원’이 조성돼 현인 동상과 노래비가 서 있고 매년 8월에는 ‘현인 가요제’가 열린다. 부산 영도다리 입구에는 현인 동상과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 대구 인터불고호텔 입구에는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경주 불국사 입구에는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서 있다.
부산 송도해수욕장 내 '현인 공원'에 서 있는 현인 동상. /전봉관 제공
<참고 문헌>
강헌, ‘자유 만세’, 이봄, 2016
박성서, ‘100년 음악 박시춘’, 소동, 2012
박성서, ‘한국이 낳은 불멸의 歌人: 가수 현인’, 뉴스메이커, 2012.11.5.
박찬호, ‘한국가요사 2’, 미지북스, 2009
‘연예수첩 반세기 가요계 42: 현인의 황금시대’, 동아일보, 1973.3.29.
‘이 산하 이 노래: 경주’, 조선일보, 1991.1.17.
‘가요 100년 그 노래 그 사연: 럭키 서울’, 동아일보, 1992.1.25.